놓다, 쌓다, 묶다
손문일의 회화적 언어-게임, 느껴지고 알게 되는 그 어디쯤
현대미술의 주류는 아직도 20세기 중후반부터 위세를 펼친 팝아트와 개념미술의 영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미술의 헤게모니를 미국이 쥐게 되고 미국 중심의 미술 생태계는 여전히 위력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런 서구 중심의 패러다임의 전개 속에서 동양화라고 하는 울타리 안에 그 기원을 삼는 예술들은 어떤 방법론으로 자신의 정체성도 지키면서 보편적인 시대의 공감을 획득할 수 있을까가 여전히 관심사로 남아 있다.
손문일은 소위 한국화 출신이면서도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온 고답적 정서나 방법론에 기대지 않고 동시대적 감성을 담으면서 한국화의 재료적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해 온 보기 드문 작가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팝아트적 색채와 개념미술적 구조는 우리시대의 동양화를 또 다른 차원에 위치하게 만드는 중요한 도전적 요소라 할 수 있겠다.
우선 지필묵의 사용 없이 알루미늄으로 형상을 컷팅하고 그 위에 그 형상의 의미를 더욱더 풍부하게 만들어줄 소재의 천으로 감싼다. 그리고 극도의 평면적인 형상을 입체화하는 묘사 작업을 추가함으로써 평면과 입체, 현실과 가상, 형상과 이미지, 물질과 정신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쾌한 비쥬얼의 유희를 보여준다. 미시적인 바탕의 디테일(패턴-무늬)과 치열하고 철저한 묘사의 정확함은 모든 것이 제거된 흰 벽의 공간 위에서 부유하면서 무중력의 허구적 공간, 초감각적이고 비현실적인 상황과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꿈과 현실의 넘나듦과 정지를 알려주는 신호등, 혹은 네온사인처럼 우리의 시선과 인식 앞에서 점멸한다. 여기는 가상적 현실인가. 현실적 가상인가.
양복과 드레스를 입은 익명의 군상은 기둥을 연상시키는 기하학적 조형의 머리를 두고 우리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다. 그것은 상투적인 윤곽선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끝없이 움직이고 있는 생명체이다. 마치 머리 없는 부처상이나 그리스의 토르소 조각상의 존재하지 않는 얼굴과 팔이 더 많은 표정와 제스처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고전적 우아함의 상징이자 기호로서 목소리를 내며 적막한 공간에 생기를 부여한다.
앤디 워홀의 독립적인 실크스크린 이미지―벨벳언더그라운드의 앨범 표지에 등장하는 바나나 같은―의 강렬함,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단순한 윤곽선과 율동하는 붓의 흐름―1965~66년 이후 등장하는 <브러시 스트로크> 연작과 같은―을 연상시키는 손문일의 팝적인 아이콘들은 셰이프트 캔버스의 해방감을 드러내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진지한 분위기와 색채를 지니고 있다.
마치 거대한 수직의 일필일획으로 느껴지는 인물상도 그렇지만, 특히나 그의 <리본> 연작은 ‘놓여있고, 쌓여있고, 묶여있으면서’ 수묵화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운필감과 함께 수묵의 재료적 특성이 어떻게 표현상으로 진화될 수 있을지 보여준다. 리본의 엮어진 형상들은 물(水)의 유동성과 붓의 유연성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드러내며, 붓의 궤적과 흔적으로 남은 기운생동, 골법용필이라는 동양화 화법의 가장 중요한 필묵의 운용을 보여준다.
외면적으론 서양의 팝적인 외형으로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동양의 수묵 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상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자세에서의 동서양적 차이 또는 신기한 일치를 혼성적인 기법과 재료로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동양화의 구습에 매몰된 채 동양화의 존재 가치를 주장하고 그 위상을 보호하려는 견해가 아니다. 동양화의 화면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발묵이나 파묵의 표현적 효과와 형식이 동양화만의 특수성으로 남을 수 없으며 그것이 오히려 동양화의 가능성을 옥죄는 한계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 손문일은 그런 수묵화 고유의 표현법이 보편적이고 현대적인 회화 언어로 승화되어야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우리시대의 진정한 수묵이란 재료와 화법을 떠나 동시대적 세계관을 담지하고 그 사상적 지평을 확장시키는 열린 개념의 그림이 되어야함을 그는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검은 먹물로 그린 앤디 워홀의 캠벨수프 캔에서, 거대한 붓질의 중첩과 운동으로 춤추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붓자국과 굽이치는 금발의 웨이브에서 검은 먹의 심오함과 자연스런 물의 흐름을 더욱 깊이 공감하고 체감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동서양 회화의 발생적 기원과 전개를 초월한 회화의 근원적 목적, 즉 기운생동의 정신적 발현의 힘이다. 아무리 표피성을 강조하는 팝아트에서조차 이처럼 회화의 정신성은 본질적으로 존재한다.
수묵화의 본질적인 의도가 사생(寫生)보다는 사의(寫意)에 있었다는 사실은 시각주의라는 감각주의의 극단과 완성을 추구하다 한계에 도달했던 서구 미술사에 많은 레퍼런스를 던져준다. 생각과 뜻을 그리겠다는 사의적 태도는 아이디어와 콘셉트가 물질적 이미지의 생산 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이라고 본 개념미술의 탈육신화와 다르지 않다.
손문일의 최근작은 이런 개념적 설치, 달리 말해 관계의 조응과 구성을 통해 사물과 언어, 그리고 그 의미의 관계 구조를 모색하는 과정으로 넘어서고 있다. 이전의 작업이 개체적인 이미지의 배열과 단일한 언어의 표현이었다면 최근작은 이런 개체들을 극적인 미장센으로 설정 편집하여 스토리텔링과 내러티브가 개입되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기를 말하기의 차원으로, 이미지를 랭귀지의 형식으로 인터렉티브한 환경 속에 전환하고자 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손문일의 인간상-오브제들은 마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정사>, <밤>, <일식> 등과 같은 고독한 영화들의 미장센처럼 허무, 고독, 단절, 소외, 미혹, 미완의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 조르조 데 키리코의 황량하고 기묘한 광장-무대공간의 정적은 손문일이 만든 시공간에서도 유효하게 흐르고 있었다. 손문일의 나레이션은 여백이라는 동양화의 몰감각적 공간감을 통해서 극대화되었다.
연출된 셰이프트 캔버스의 적절한 거리두기·관계맺기는 화이트큐브의 닫힌 공간을 무한한 깊이의 열린 공간으로 만든다. 과감한 생략과 삭제로 육적인 눈이 아닌 정신의 눈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동양회화의 여백의 역학, 주변 배경들과의 일시적 단절을 통해 영원한 자유를 획득하는 존재의 의미를 다시 보게 만드는 여백의 패러독스를 손문일은 실험적 공간 연출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결국 손문일은 팝아트적인 전략과 개념미술적인 논리의 혼용을 통해 감각과 인식,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유기적인 통일을 무표정하고 중성적인 여백의 공간 속에 구성해 놓는다. 느껴지는 지점과 알게 되는 지점 사이에는 그가 장치해 놓은, 자세히 들여다봐야 볼 수 있는 아주 사소하고 조용한 모티프들이 작동하고 있다. 이때 다른 차원의 문맥 속에서 일상적 조건의 사물과 신체에 가해지는 ‘낯설게하기’는 존재의 본질 보다 존재의 실존을 드러내고 목도하게 만든다. 부조리한 현재적 조건 안에서 그 형상들은 그냥 놓여져 있기를 거부하면서 조용히 내재적인 아우라를 쌓고, 자발적으로 생동하면서 시공간의 묶음을 욕망한다.
‘이것은 남자가 아니다. 이것은 여자가 아니다. 이것은 낙엽이 아니다.’ 손문일은 무엇을 그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들 사이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긴장을 통해 그 무엇이 다른 차원의 무엇으로 읽혀지기를 의도하고 있다. 관계(relationship)이라는 작업은 작가 본인-자화상에서 시작되어서 최후에는 타자-관객으로 이어지고 끝나는 여정이라고 그는 말한다. 존재의 이름-개념은 본래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관계에 의해서 정의되고 규정된다. (회화적) 언어의 의미는 본질적 특징이나 지시 대상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호들의 관계망을 통해 추출된다는 것이 언어-게임이론의 기본 개념이다. 손문일은 존재적 본질을 직관하기 위해서는 관계의 망 속에서 그것을 바라보기를 권한다.
그의 전시는 수수께끼 같은 게임을 쉬지 않고 제시하면서 관객들의 참여를 유도한다. 그리지 않고 보여주고, 말하지 않고 알려주는 그 모순된 게임의 전개가 계속해서 궁금해진다.
I 이건수 미술비평